120년 전 만주 일본군 집단설사가 낳은 역사적인 약, 정로환

120년 전 만주 일본군 집단설사가 낳은 역사적인 약, 정로환

1904년 천황 칙령으로 탄생한 배탈약

 

러일전쟁 당시 만주 주둔 일본군의 집단 설사병 사태가 현재까지 사용되고 있는 대표적인 배탈·설사 치료제 정로환의 탄생 배경으로 밝혀져 화제다. 1904년 발발한 러일전쟁에서 일본군의 전투력 약화 위기를 해결하기 위해 천황이 직접 칙령을 내려 개발된 이 약물은 120년이 지난 현재까지도 국민 상비약으로 사랑받고 있다.

일본 다이코신약이 개발한 모쿠크레오소트 제제가 수천 가지 약품 중에서 최고의 효과를 보였고, '러시아를 정벌한다'는 의미에서 정복할 정(征), 로서아 로(露), 둥글환(丸)을 조합해 정로환이라는 이름이 붙여졌다. 해방 후 1973년 동성제약이 국내 생산을 시작했지만, 일본 측 기술자를 기생방에서 접대해 제조 비법을 얻어왔다는 흥미로운 일화까지 전해진다.

하지만 주성분인 크레오소트에 포함된 크레졸 성분의 발암 가능성 논란과 대체 약물의 등장으로 사용량이 감소하는 추세다. 과연 정로환은 어떤 역사적 배경을 가지고 있을까?

‘러시아를 정벌한다’는 제국주의적 의미를 담고 있는 정로환

만주 일본군 집단사망 사건, 천황 칙령이 만든 국민약의 시작

물갈이 설사로 쓰러진 일본군, 전쟁 승패를 좌우한 위기 상황

1904년 러일전쟁 발발 직전 만주에 주둔한 일본군에서 원인 불명의 집단 사망 사건이 발생했다. 평소 건강하던 군인들이 특별한 외상이나 질병 징후 없이 연이어 목숨을 잃는 기이한 현상이 벌어진 것이다. 일본군 의무대의 긴급 조사 결과, 사망 원인은 바로 만주 지역의 열악한 수질과 급격한 환경 변화로 인한 심각한 설사병으로 판명됐다.

만주 지역 특유의 오염된 식수와 물갈이 현상이 일본군 병사들의 소화기관에 치명적인 타격을 가했던 것이다. 설사로 인한 탈수와 영양 손실은 병사들의 전투력을 급격히 떨어뜨렸고, 이는 곧 러일전쟁의 승패를 좌우할 수 있는 심각한 군사적 위기 상황으로 이어졌다. 이 상황을 보고받은 메이지 천황은 즉각 칙령을 하달해 전국의 제약회사들에게 효과적인 배탈·설사 치료제 개발을 긴급 명령했다.

수천 종 약물 경쟁에서 승리한 다이코신약의 혁신적 제제

천황의 긴급 명령에 따라 일본 전역의 제약회사들이 총력을 기울여 수천 가지의 배탈·설사 치료약을 개발하기 시작했다. 이는 당시로서는 전례 없는 대규모 의약품 개발 프로젝트였으며, 각 제약회사들은 자사의 기술력을 총동원해 최고의 약효를 자랑하는 치료제 개발에 매진했다.

치열한 경쟁 끝에 최종 선택받은 것은 다이코신약에서 개발한 목타르 크레오소트(wood-tar creosote) 제제였다. 이 혁신적인 약물은 목재를 증류해 얻은 크레오소트를 주성분으로 하여 강력한 방부살균 작용과 장 기능 정상화 효과를 동시에 발휘했다. 실제로 이 약을 복용한 일본 병사들은 설사병을 신속히 극복했고, 이는 러일전쟁에서 일본군의 승리에 결정적인 역할을 했다.

군국주의 상징에서 국민 상비약으로 변화한 파란만장한 여정

2차 대전 후 '국제적 신의'로 이름까지 바꾼 복잡한 역사

러시아를 정벌한다는 공격적인 의미를 담은 정로환은 일본 국민들 사이에서 기적의 국민약으로 각광받았다. 하지만 2차 세계대전 패전 후 일본 정부는 국제사회와의 관계 개선을 위해 '국제적 신의'라는 명목으로 정복할 정(征)자를 바를 정(正)자로 변경해 정로환(正露丸)으로 개명하는 조치를 취했다.

그러나 현재까지도 일부 제약회사들은 전통을 고수한다며 정복할 정(征)자를 계속 사용하고 있으며, 심지어 바를 정(正)자로 바뀐 현재의 이름도 러시아 입장에서는 여전히 불쾌감을 줄 수 있는 상황이다. 이는 정로환이 복잡한 역사적 맥락을 품고 있는 특별한 존재임을 보여주는 대목이다.

태평양전쟁 시절 '전몰기념환'까지 된 군국주의 선전 도구

태평양전쟁이 절정에 달했던 시기 정로환은 일본의 군국주의를 찬양하는 상징적 도구로까지 활용됐다. 당시 제약회사들은 대대적인 광고 캠페인을 통해 '육해군어용약'이라는 문구를 내세우며 황군 위문품의 최적 약품이라고 적극적으로 선전했다. 심지어 일부 제품은 상품명을 '전몰기념환'으로 개명하기까지 했는데, 이는 전사한 군인들을 기리는 의미를 담은 것으로 해석된다.

현재도 일본의 야스쿠니 신사에는 정로환이 당당히 전시되어 있어 과거 군국주의 시대의 상징으로서 그 흔적을 확인할 수 있다. 이러한 역사적 배경은 정로환이 단순한 치료제를 넘어서 일본 근현대사의 복잡한 단면을 보여주는 문화적 산물임을 시사한다.

태평양전쟁 시기에는 일본의 군국주의 선전도구로도 활용됐다.

한국 진출기, 기생방 접대로 얻어낸 제조 비법의 비화

해방 이후 한반도에서는 정로환을 계속해서 일본에서 수입해 사용해야 하는 상황이 지속됐다. 국내 자체 생산이 본격적으로 시작된 것은 1973년 동성제약에 의해서 였는데, 이 과정에서 흥미로운 일화가 전해진다. 동성제약 창업주인 고 이선규 회장은 일본 다이코신약의 전 공장장을 기생방 등에서 극진히 대접하며 정로환의 핵심 원료와 정확한 배합 비율 등의 제조 비법을 획득했다는 야사가 널리 알려져 있다.

이러한 일화는 당시 일본이 정로환 제조 기술의 해외 유출을 얼마나 철저히 차단하고 있었는지를 보여주는 증거이기도 하다. 국내 생산이 결코 쉽지 않았던 상황에서 창업주의 치밀한 전략과 인맥 활용이 한국의 정로환 자체 생산 시대를 열었던 것이다.

현재도 사랑받는 배탈·설사 치료의 대표 주자

정로환은 방부살균 작용과 위장 기능 촉진에 탁월한 효과를 보이는 여러 생약제를 과학적으로 배합한 복합 제제다. 배탈·복통·설사 치료에서 높은 효과를 발휘하며, 특히 방부살균 작용을 비롯한 진정, 진경, 지사, 구풍 작용 등의 다면적 치료 효과를 통해 장 질환 치료의 대표적인 의약품으로 확고히 자리잡고 있다.

현대에 들어서는 특유의 강한 냄새를 제거한 당의정 형태로 개발되어 복용 편의성이 크게 개선됐다. 이러한 개선을 통해 과거보다 훨씬 복용하기 쉬워졌으며, 특히 어린이나 냄새에 민감한 사람들도 부담 없이 복용할 수 있게 됐다.

여러 생약제를 배합한 제제로 배탈, 복통, 설사 치료에 높은 효과를 보이며 한국 가정의 필수 상비약으로 자리잡았다

발암 논란과 대체 약물 등장으로 변화하는 위상

정로환의 주성분인 크레오소트는 목타르를 증류 과정을 거쳐 만든 목초액으로, 일반적으로 나무의 방부제나 살충제 용도로 광범위하게 사용된다. 크레오소트는 페놀이나 크레졸 같은 다양한 방향족 화합물들이 복합적으로 섞여 있는 혼합물의 성격을 띠고 있다.

여기서 가장 큰 우려를 낳고 있는 성분이 바로 크레졸이다. 크레졸은 암을 유발할 가능성이 있는 독성 물질로 분류되어 있어 소비자들의 건강 안전성에 대한 불안감을 가중시키고 있다. 이에 대응해 우리나라에서는 최근 크레졸 성분을 제거한 정로환F를 별도로 생산하고 있다. 하지만 크레졸의 유해성이 학술적으로 완전히 입증되지 않은 상태여서 일본에서는 여전히 오리지널 정로환이 생산되고 있다.

시대 변화와 함께 줄어드는 사용량, 새로운 대안들의 부상

시대가 변하면서 배탈·설사 치료를 위한 다른 현대적 대체 약물들이 속속 개발되면서 정로환의 사용량이 전반적으로 감소하는 추세를 보이고 있다. 냄새를 효과적으로 차단하기 위해 당의정 형태로 제조해 판매하고 있음에도 불구하고, 시장에서의 점유율은 예전만 못한 상황이다.

한편으로는 무좀이나 탈모 등에 효과가 있다는 과학적 근거가 부족한 민간요법으로도 잘못 사용되는 경우가 있어 올바른 사용법에 대한 교육이 필요한 실정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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